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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0장 농성해제 (1993년 7월 22일, 농성 331일째)
저자 박정원(상지대학교)


 

                    제50장. 농성해제 (1993년 7월 22일, 농성 331일째)

 

                                                                                         박정원(상지대학교)

 

7월 22일, 아침 8시 30분에 농성장으로 출근했다. 오랫동안 숙식을 해서 그런지 마치 안방처럼 느껴지던 농성장이 언제부터인가 약간씩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비장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없으며, 출석하는 동료 교수들도 그냥 한번 둘러보고 지나가는 듯한 표정이다. 이제 이 농성장을 떠나야 할 시기가 왔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후 5시에 운영위원회를 열고 이어 6시에 전체회의를 연다고 했다. 나는 회원교수들이 부담 없이 토론할 수 있도록 오후 2시 조금 넘어 집으로 왔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아이들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같이 마을 뒤 저수지와 논을 휘 돌아왔다.

 

교협 전체회의 결과는 이미 직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농성해제! 하지만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복직이야 어떻게든 이루어지겠지만, 엄청난 싸움을 하다가 구체화된 성과를 확보하지 못하고 농성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마치 화장실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처럼 제대로 된 마무리를 못하고 떠나는 느낌이었다. 일단 농성을 해제하고 나면 교협의 교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고, 농성해제는 이사들에 의한 교협 길들이기의 일환일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해직기간 내내 비워주지 않았던 연구실이야 그대로 있었지만, 실제 나의 복직도 이로부터 반년이나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이날 회의 결과는 우리대학의 원로 여성교수이신 조은경 교수가 당직일지에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에 따르면, 먼저 김동균 교수의 명예훼손 소송건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이어 이광춘 교수가 김찬국 선생과 김상준 이사장을 만나 나눈 얘기를 보고했다. 먼저 이 교수가 교협의 농성을 풀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단다. 애초에 농성의 시작이 박정원 교수의 부당해직으로 시작된 것이고, 아직 그의 복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인데 어떻게 농성을 푸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사장은 박교수의 복직은 현재의 체제에선 어려우니 총장인준을 먼저 받게 한 다음, 총장님이 들어와서 풀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미 김찬국 선생에게도 교수들을 설득해 농성을 풀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총장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명분이 서는 일이 아닌가 하는 말도 덧붙였단다. 이 교수는 관선이사들을 신뢰할 수 없지만, 김찬국 선생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자신의 의사를 설명했다. 이어 여러 교수들의 토의가 진행되었지만, 이광춘 교수가 “박정원 교수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은 없었지만, 김찬국 교수의 태도를 보면 그 분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한 주장에 따라 회의는 농성해제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농성장으로 이용해 오던 본관 401호는 교협의 사무실로 계속 쓰기로 했다. 지금은 교협 농성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던 내 연구실과 김대식 교수 연구실은 모두 교협의 자료실로 되었다.

 

이날 농성일지 마지막 페이지에 연세가 지긋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싸워왔던 조은경 교수의 감회가 실려 있다.

 

“마지막 농성장 당직 임무를 철저히 마치며, 마지막 당직일지를 기록함에 감회를 느끼며 331일째 농성장 당직일지의 기록을 마칩니다. 그 동안의 수많은 역사의 현장들을 마음속에 깊이 그려 넣으며, 어려운 시련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1993년 7월 22일 오후 8시 2분전

상지대학 농성장에서 조은경

 

이미 열기가 식어버린 농성장이었지만, 때 묻은 스티로폼을 걷어내자니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추억어린 사건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강릉경찰서에 끌려가 조사 받던 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전경들과 몸싸움하던 일, 추석날 저녁 텅 빈 농성장에 홀로 앉아 치악산위로 떠오른 달을 쳐다보던 일, 원주시내에서의 촛불행진, 꽁꽁 언 손으로 서울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누어주던 일, 광화문에서 종로와 명동으로 행진하며 이사장 퇴진을 외치던 우리 제자들, 부산에서도 목포에서도 올라와 우리를 격려해 주던 민교협 교수님들, 지역의 목사님들・신부님들・농민들・시민단체회원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 특히 집시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으로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함께 싸워준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의연했던 가족들.

 

1993년 7월 22일(목) 오후 8시, 우리는 철야농성을 해제했다. 지난 해 8월 26일에 시작해 그해 늦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보내고 새해를 맞고 또다시 봄을 지나 여름의 한가운데서 농성을 해제한 것이다. 날짜를 따져 보니 총 331일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장의 교수투쟁이었다.

 

* 원고를 다듬고 있는데, BBC와 CNN에서 며칠 전 타계하신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의 추도식을 생중계하고 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 카스트로 쿠바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국 정상 90명이 참석하여 연이어 헌사를 바치고 있다. 그 중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추도사가 압권이라서 BBC에서 자막으로 계속 내보내고 있다. “만델라 대통령은 자유와 평등(Freedom and Equality), 민주주의와 정의(Democracy and Justice) 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우리의 위대한 스승(Teacher)”이었다고 추도사를 한다.

 

스승! 누구도 함부로 이 말을 쓰지 못한다. 만델라처럼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인류사회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델라처럼 위대한 인물들은 아니지만, 해고의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교육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싸운 동료교수들이 참 스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델라 덕분에 노벨 평화상을 함께 수상한 백인 대통령(이름은 기억 안남)도 있는데, 동료교수들 덕에 나도 함께 칭찬을 받는 것이 이 기분일까? 만델라 추도식을 보면서 당시의 순수했던 우리 모습을 잠시 생각해 봤다.

 

자유와 민주와 평등의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넬슨 만델라! 그 분을 추모하는 추도식은 각국 지도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고인을 추도하고, 자국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파하고 소통하는 금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광장이다. 이런 의미 있는 행사에 우리나라는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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