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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또 하나의 숙제, 정치문법의 해체와 재구성
저자 하상복(목포대학교)


[민교협의 시선] 또 하나의 숙제, 정치문법의 해체와 재구성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소쉬르(Ferdinand Saussure)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주었다. 언어는 사물을 의미화하고 있는 기호다. 그 점에서 그 둘 사이에는 일정한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그 관계라는 것이 사실은 어떠한 존재론적 필연성도 없다고 소쉬르는 말한다. 기호로서의 언어와 사물 사이의 의미관계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만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구성물일 뿐이라는 논리다. 예컨대, 사과라는 과일을 사과라는 낱말로 부르는 데 사실 그렇게 명명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를 우리는 찾을 수 없다. 

소쉬르가 통찰한 언어의 또 다른 진실은 언어의 의미란 내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계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점이다. 예들 들면, 우리가 여자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고 할 때 그에 대비되는 낱말인 남자를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언어 속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의 이분법적 정신구조 때문이라고 구조주의는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바르트(Roland Barthes)가 대중문화의 의미체계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한 ‘이항대립’이 바로 그 구조다. 이렇게 구조주의 언어이론에 기댄다면 특정 공동체의 언어는 보편적인 이항대립의 구조 위에서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들만의 임의적인 의미의 형식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학적 지평은 우리가 정치세계에서의 언어를 관찰하는 데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정치세계가 사용하는 언어는 결코 보편적인 의미를 담보하고 있지 않다. 정치언어는 특정한 공동체의 역사적 궤적이 만들어낸 지층 위에서 생산된다. 소쉬르가 말한 의미관계의 자의성은 정치세계에서는 집단적 경험과 기억의 특수성에 관계한다. 정치세계에서 언어의 의미는 일정한 정치적 이분법 위에서 생성되고 정의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정치언어의 문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정 공동체의 정치언어사용법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집단적 삶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열쇠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근대를 조형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동인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해방 이후 몇 년간의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생성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분단체제’로 불리는 것으로서 한국은 38도선 이북에 자리 잡은 공산주의 체제와의 적대성과 경쟁으로 자신의 정치적 존재성과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그 과정에서 근대체제 한국의 이념적 외연은 반공주의로 확립되었고, 내적인 차원에서는 미국식의 시장자본주의를 동력으로 삼아 적대적 체제로부터 승리하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삼아왔다. 1960년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의 발전은 곧 반공주의의 강화와 자본주의적 성장이라는 두 이념적 가치와 정체성에 의해 추동되어 왔다. 

그러한 정치적 근대는 한국에서 정치언어의 문법구조를 결정짓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구에서 탄생해서 우리에게 들어온 근대의 정치언어들은 한국의 역사와 이념적 특수성 속에서 새롭게 그 의미를 획득했다. 서구에서 군주권위주의의 반정립으로 태어난 자유라는 낱말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체제 억압의 반의어로 성립했다. 서구 자본주의체제의 불평등과 분열을 완화하기 위한 이념으로 창출된 복지와 사회주의는 한국에 들어와 자본주의 성장을 방해하는 나태함과 북한 공산주의와 유사한 체제를 건설하려는 반국가적 음모로 정의되어 왔다. 정치공동체의 주권과 관련해 가장 근원적인 주체성을 지칭하는 인민이라는 개념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름과 결합하면서 적대적이고 반국가적인 언어로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언어의 세계 속에서 한국만의 이항대립이 성립한다. 대립의 한 축에는 반공주의와 시장자본주의의 가치가 위치하고 그 반대편에는 용공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치가 서 있게 된다. 한 쪽 정치언어들의 의미와 쓰임새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 정치언어의 의미와 용법을 인식해야 한다. 반공, 안보, 질서, 화합, 성장, 발전, 시장, 자본주의, 자유 등의 정치언어들은 용공, 친북, 무질서, 대결, 분배, 국가, 사회주의, 평등과 같은 불손한 정치언어들을 만나 정치적 성스러움을 확보한다.  

루마니아의 종교인류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따르면 인류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인간이고, 세속화되었다고 믿는 근대적 인류 또한 그 종교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케임(Emile Durkheim)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내용은 다르더라도 종교성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원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그 종교성의 핵심은 ‘성과 속’이다. 그러니까 종교란 근원적으로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항대립 위에 성립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점은 성스러움은 속됨의 대비로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이러한 논의 지점 위에서 우리는 근대정치와 근대국가 또한 외양으로는 세속성의 원리를 따르지만 그 무의식적 심층에서는 여전히 성과 속의 종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인식을 유도하는 이항대립의 문법에서 반공주의와 시장자본주의는 성스러움의 대상이고 그 반대편의 언어들은 속됨의 대상이다. 한국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그러한 이항대립의 종교적 문법을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 세력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스러움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고 그 반대편의 언어들을 외치는 사람들을 더럽고 오염된 존재들로 비난하고 절멸하려 한다. 그들은 불결한 존재인 것이다.  

아마도, 그처럼 정치적이면서 종교적인 이항대립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언어가 노동일 것이다. 근로와 노동의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세밀한 관찰과 분석을 요하는 언어들일 텐데, 한국에서 근로는 이항대립의 왼쪽에서 신성함을 부여받고 있고, 노동은 그 반대편에서 속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월 1일을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로 이름 부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분단의 역사 속에서 노동은 북한 친화적인 언어로 간주되어 오지 않았는가.  

한국은 오랜 시간 정치적 보수주의의 패권 위에서 그들이 추앙하는 성과 속의 이항대립을 받아들여 왔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문법을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정치세계를 만들어나가길 원한다면 이제 1950년의 분단과 전쟁 위에서 탄생한 정치적 이항대립과 성과 속의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치적 세계는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언어가 구성하는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현실 위에서 운동하는 것이고, 정치언어를 두르고 있는 문법적 형식이 정치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인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 전개되고 있는 헌법 개정의 과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헌법 개정의 정치는 권력구조와 제도 개혁의 프로세스이기도 하지만 정치언어의 문법구조를 고치는 장이기 때문이다.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고, 국민을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한국의 정치문법에서 속됨의 세계에 있던 언어들을 헌법이라는 근대적 성스러움의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다. 헌법 개정의 정치는 더렵혀진 정치언어를 정화하는 일, 속됨의 세계에 갇힌 정치언어를 해방하는 일,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정치문법과 이항대립의 구조를 창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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