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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질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저자 장시기(동국대학교)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질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장시기(동국대학교)

 


   I. 질 들뢰즈와의 만남

   질 들뢰즈와의 만남은 우연인 동시에 필연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니며 강의를 하던 1995년 11월의 어느 날, 나는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의 조그마한 벤치에서 질 들뢰즈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는 부인과 딸이 병간호를 하다가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6층 아파트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일흔 두 살의 나이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다는 기사였다. 왕성한 글쓰기와 수많은 저서들을 출판한 노 교수의 자살을 어떻게 읽어야만 할까? 나는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들뢰즈가 자살을 한 이유를 생각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문득, 그는 부인과 딸의 병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어린 딸의 우유 값이라도 벌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 학교 저 학교 떠돌아다니는 내 처지가 마치 누군가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프랑스에서 왕성한 글쓰기와 수많은 저서들을 출판한 노 교수의 알 수 없는 자살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추측한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우연히 질 들뢰즈를 상상 속에서 만났다.

 

 

   질 들뢰즈와의 우연한 만남이 곧바로 그의 책들에 대한 필연적인 글 읽기의 만남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의 나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미국의 수많은 비평이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식상해 있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1920년대 영국의 실제비평과 1940년대 미국의 신비평 이론으로 영문학 연구를 시작하고, 게오르그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과 백낙청 교수의 민족문학론을 통하여 현실과 문학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에 대한 지식을 얻었지만, 항상 그 무엇인가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삶이었다. 세계나 민족이나 계급과 더불어 나(혹은 개인)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은 문학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계급, 그리고 세계의 진보와 발전, 혹은 혁명과 별개의 존재인가, 아니면 그것들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가? 1980년대의 대학과 대학원 생활은 그러한 문학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계급을 위해 나의 모든 삶을 희생해도 좋다는 각오와 맹서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지식과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문학공부와 학문적 지식이 개인의 삶을 사회와 국가 그리고 계급운동에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믿음의 종교와 사유의 지식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나의 삶과 개체성을 찾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것은 서구 유럽의 수많은 서로 다른 이론가들을 만나는 여행이었다. 내가 찾은 것은 자크 데리다의 해체이론과 탈중심화, 그리고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주의와 이질언어성 이론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데리다의 해체이론과 탈중심화, 그리고 바흐친의 대화주의와 이질언어성의 이론으로 다시 읽기를 하는 것은 마치 잃어버린 나(개인)의 삶을 새롭게 찾아내는 듯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언어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나 탈중심화도 이론이었고, 문학의 대화주의와 이질언어성도 이론의 한 갈래인 듯했다. 그것은 마치 근대 자본주의의 자유주의 이론이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대체된 것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근대 문학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이론이라는 이름으로 후기근대 문학이론을 대체한 듯했다. 근대의 문학이론과 사유의 지식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과 계급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후기근대의 문학이론과 사유의 지식은 그 모든 이성과 언어를 해체하고 탈중심화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고민 속에서 질 들뢰즈와의 만남은 필연이 되었다. 1997년에 나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하여 대한민국을 떠났다. 그 여행 내내 나는 질 들뢰즈의 책들을 읽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 머무는 동안, 그리고 미국 열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미국의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와 북부를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뉴욕에서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질 들뢰즈를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안티-오이디푸스(Anti-Oedipus)』였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 그리고 『영화 1(Cinemma 1)』과 『영화 2(Cinemma 2)』였다. 노마드와 노마돌로지, 그리고 리좀과 리트로넬로 등등의 들뢰즈가 사용하는 새로운 개념들의 언어적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모든 책들은 나에게 그 전에 읽었던 다른 서구 유럽의 근대 이론가들이나 사상가들과 다르게 다가왔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것이 1991년에 출판된 그의 마지막 저서이고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로 출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였다.

 

   II. 새로운 지식의 구성

   들뢰즈는 이론가가 아니다. 이론가가 아니라는 말은 자연과학자는 물론이고, 오늘날 대학의 강단과 근대 학문을 지배하고 있는 인문과학자나 사회과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들뢰즈는 또한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고, 영화와 소설 등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지의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반면에 들뢰즈는 그 이미지와 생명을 사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말 그대로의 예술가적 철학자(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지식을 예술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적 근대의 지식은 단지 과학적 지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에 종교적 지식이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과 예술의 모든 지식을 지배한 것처럼 근대 서구유럽의 과학적 지식은 지구촌 전체의 철학과 예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주어진 패러다임을 맹신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맹신을 사회와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서로 유사하다. 근대 이전 서구 유럽의 종교적 지배가 근대 이후 지구촌 전체의 과학적 지배가 된 것이다.

 

   철학적 지식과는 달리 예술적 지식은 근원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현재에 생성되는 예술은 항상 종교와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의 논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계와 더불어, 예술적 지식 자체가 생명을 창조하고 생성시키는 즐거움인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의 영속적인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예술적 지식은 근대의 과학적 지식이 정의하는 예술론이나 미학이론이 아니라 생명의 지식이고 몸에 대한 지식이며 자연에 대한 지식이다. 변화하고 생성하는 예술이 곧 생명이고 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나 절대 정신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고 개개인의 몸과 생명은 최고의 예술들 중에서 최고의 예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서문을 시작하면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마도 삶의 말미에, 그리고 나이가 들음과 동시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때에 제기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삶이 역동적이고 젊었을 때, 우리는 생성적인 몸 그 자체로 살기 때문에 추상적인 예술적 지식으로 생명을 창조하고 생성시키는 반면에 역동적인 삶이 시들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생성적인 몸을 사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지식과 달리 과학적 지식은 관찰을 통한 기능의 발견에 있다. 따라서 인문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으로 이루어진 근대의 학문체계는 근대 자본주의 국가체제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관찰하여 그 기능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 문학연구는 시나 소설 등등의 문학텍스트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은유와 상징의 언어적 기능을 발견하고자 하고, 과학적 역사연구는 역사적 사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인물이나 사건 등등의 시대적 기능을 발견하고자 한다. 학문연구의 대상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근대의 과학적 학문체계가 추구하는 정치학이나 경제학 혹은 철학이나 사회학도 마찬가지이다. 기능의 발견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결코 생명의 변화와 새롭게 생성되는 미래의 생명에 대하여 사유할 수 없다. 따라서 관찰을 통한 기능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과학적 지식은 오직 과거에 종속되어 있는 현재의 기능만이 있다. 그 기능은 대립과 갈등의 기능이고, 그러한 기능의 가장 과학적인 지식이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생명, 그리고 창조적 삶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물질의 현실적 기능을 관찰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인문예술, 사회현상, 그리고 자연생명을 사유하는 철학적 지식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사유의 철학적 지식을 통하여 “나이가 든다는 것은 영원한 젊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유, 즉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은총의 순간을 향유하는 순수한 필연성의 기간이고, 또한 생명의 모든 부분들이 함께 모든 시대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형상을 미래의 시간으로 소환”하는 축복의 기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축복은 오늘날의 철학이 몸의 생명성을 사유할 수 있는 개념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철학자란 개념의 친구이고, 개념의 잠재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이데아” 개념의 철학자이고, 근대 유럽의 데카르트는 “존재” 개념의 철학자이다. 고대 그리스라는 내재성의 장은 예술이 창조하는 형상의 “이데아”라는 개념을 필요로 했고, 근대 유럽이라는 내재성의 장은 근대의 예술적 형상이 작동하는 “존재”라는 개념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촌 세계라는 내재성의 장은 과거에 만들어진 예술적 형상의 “이데아”나 “존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무한성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사유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근대의 과학적 철학자가 아닌 탈근대의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사유하는 철학자로서 들뢰즈는 노마드와 노마돌로지, 리좀과 리트로넬로, 그리고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등등의 개념을 창조한다. 과거의 철학에서 사유하는 인간이나 신이라는 존재의 개념은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노마드의 개념에 포용되어 있으며, 근대가 만든 국가철학적 지식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국가와 개인의 역사와 지식의 모든 이론은 노마돌로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와 동시에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노마드의 개념은 인간과 신이라는 존재의 개념을 넘어서서 비인간과 무생물 그리고 비가시적인 존재 모두를 포용하며, 노마돌로지의 개념은 국가철학적 지식과 개인적 주관성을 넘어서서 우주와 자연의 모든 섭리를 포용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사용하는 리좀의 개념은 나무의 줄기와 잎사귀, 꽃과 열매, 그리고 뿌리를 모두 포용하는 노마드의 개념이며, 리트로넬로의 개념은 차이와 반복, 그리고 생성과 생산을 모두 포용하는 바람이나 물과 같은 시간적 흐름의 개념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사용하는 노마드와 노마돌로지, 리좀과 리트로넬로 등등의 모든 개념들은 인간과 비인간, 개인과 국가, 그리고 자연과 우주를 넘어서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모두의 “영토화와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의 과정”이라는 시간성의 사유 속에 포용되어 있다.

 

 

 

  

 

 

 

 

 

 

 

 

 

 

 

 

 근대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지배하는 공간의 운동이론은 시간성을 배제하지만,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시간성의 사유는 공간의 대립과 갈등을 구성하는 운동이론을 포용하는 동시에 그러한 공간의 운동이론을 시간의 차이와 생성의 이론에 대한 사유 속으로 끌어들인다. 공간의 운동이론은 “이방(異邦)”이나 “이단(異端)”, 혹은 “오랑캐(夷)” 등등의 개념을 통하여 또 다른 수많은 공간들에 대한 배제와 더불어 닫힌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지배와 피지배, 혹은 대립과 갈등의 변증법에 대한 사유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플라톤의 이데아적 사유는 도시국가라는 현실 삶의 공간이 이데아라는 절대적 공간과 대립하거나 갈등하며, 근대 서구유럽의 기독교 국가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데카르트의 존재철학은 현실적인 서구유럽의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존재와 비현실적인 외부의 모든 존재들을 비존재로 간주하는 존재와 비존재의 갈등과 대립을 사유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나 근대 서구유럽처럼 닫힌 공간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열려져 있는 지구촌 세계의 공간들이고, 그 삶의 공간들은 시간적 변화에 따라 서로 넘나들며 새로운 그 무엇으로 생성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공간이 지니고 있는 운동의 논리와 더불어 시간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생성의 논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III. “그 무엇 되기”의 생성적 지식

   과거의 논리에 그대로 순응하는 근대의 철학, 혹은 현실적 공간 속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작동하는 운동의 논리만을 추적하고자 하는 근대의 과학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의 생성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들뢰즈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는 ‘가장 아름다운 사유’이거나 ‘가장 아름다운 삶’이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는 그 누구에게 동의하거나 그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 동의하는 것”은 내가 과거의 나에서 현재의 새로운 “ 그 누구”의 나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 무엇을 위하여”라는 것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그 무엇”을 나의 생성물로 전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그 누구”의 나와 새롭게 생성되는 “그 무엇”이라는 나의 생성물은 마치 대지의 지층들이 대지의 역사를 켜켜이 축적시키고 있는 것처럼 내 몸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은 그 시간의 축적물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가 생성시키는 노동자와 여성과 어린이와 동물이라는 현실의 소수자가 되는 동시에 그 삶들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소수자 되기와 소수자적 삶의 향유는 시와 소설, 영화 등등의 예술 텍스트들을 읽고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다양한 문화의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들과 더불어 세계와 사회와 국가와 민족과 계급을 사유하는 동시에 노동자와 여성과 어린이와 동물에게 동의하는 것을 통하여, 마치 근원적으로 노마드인 내가 국가중의와 가족주의 의 근대적 세계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아들이 되고 학생이 되고 남자가 되고 교수가 되고 아빠가 된 것처럼 자유로운 지구촌 사회가 지니고 있는 상호생성의 세계 속에서 노동자가 되고 여성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동물이 되고, 심지어 나무나 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끊임없는 생성의 세계 속에서 노동자성, 여성성, 어린이성, 동물성, 그리고 식물성 등등의 감각이 마치 대지의 지층처럼 내 몸의 감각 속에 하나씩 하나씩 쌓여나가는 것은 무한의 우주적 시간 속에서 유한의 현실적 몸을 지니고 있는 내가 순간순간 무한의 우주적 시간을 경험하는 동시에 무한의 우주적 시간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그렇게 고전적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비평 혹은 주석달기의 근대적 지식을 넘어 나로 하여금 “그 무엇 되기”의 새로운 지식을 향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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