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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웅>에 나타난 사랑과 개인의 관계에 대하여
저자 김규종(경북대학교)


<영웅>에 나타난 사랑과 개인의 관계에 대하여

 

                                                            김규종(경북대 노문학과)

 

장예모는 중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에서 취재한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중국영화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켜 세계 영화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제5세대 대표감독으로 불린다. 그는 모택동이 주도했던 '문화혁명'의 과오를 정면으로 비판해 천개가와 더불어 서구 영화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조를 이끌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장예모는 소품 <집으로 가는 길>로 1950년대 후반 중국 오지를 배경으로 한 사랑의 아름다운 서사를 보여줘 <타이타닉>의 자극적이고 격정적인 사랑과는 대척적인 유장하면서도 섬세한 인간내면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내 주목받았다.

<영웅>은 "2년 이상의 기획과 6개월 남짓한 야외촬영, 3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여한 이 시대 최고의 스펙터클"로 소개되어 있다. 영화는 왕가위 사단으로 유명한 양조위와 장만옥, 대륙의 대표적인 무협배우 이연걸, 장예모가 발탁하여 성장시켰으며 '포스트 공리'로 알려진 장자이 등의 호화 배역으로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영웅>은 장예모가 감독한 최초의 대작 무협영화라는 점으로도 적지 않은 화제를 몰고 왔으며, 그 이면에는 <음식남녀>(1994)로 명성을 거둔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2000)이 거둔 소란스러운 성공이 자리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영웅>의 시대배경과 서사구조

기사 관련 사진
 영화 <영웅>포스터
ⓒ 코리아픽쳐스

 


영화의 시대배경은 중국이 최초의 통일을 눈앞에 둔 기원전 220년대 후반이다. 기원전 403년부터 진의 통일이 이루어졌던 기원전 221년까지 중국은 전국시대를 경험하면서 통일대업을 완수하기 이전의 혼란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중국에서는 최강국 진나라를 둘러싸고 여러 나라들의 합종연횡이 형성될 정도로 잦은 전쟁과 살육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영웅>의 주인공들은 조나라를 조국으로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영웅>의 서사구조는 외견상의 복잡성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며, 그것도 왕과 자객 사이의 대화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건조할 지경이다. 어릴 때 진나라 군대에게 부모를 잃고 진나라의 양부모에게 양육된 무명(이연걸)은 원수를 갚기 위해 10여 년 동안 10보 필살검법을 공부하여 당대 최고수의 경지에 도달한다.

진나라 왕(나중에 진나라 최초의 황제가 되는 인물, 진시황)은 자객들의 암살음모를 예방하기 위하여 100보 이내 접근불가를 천하에 공포하였기에 무명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고수들의 방조를 필요로 한다.

무명의 첫 번째 희생으로 자신을 선택한 인물은 창의 고수 장천 (견자단). 그의 뒤를 이어 비설(장만옥)이 희생을 자처한다. 조나라 장군의 딸로 진나라 군대에게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3년 전에 연인 파검(양조위)과 더불어 진왕을 습격한다. 그러나 파검의 느닷없는 살해철회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을 살해해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하는 파검과 왕을 죽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비설 사이에 사랑과 대의를 둘러싼 혈투가 벌어진다. 여기 더하여 그들의 사랑 너머로 일편단심 파검을 향하는 여월(장자이)의 애틋한 순애보가 배경으로 자리한다.

넘고자 하지만 끝내 넘을 수 없는 어떤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인물들의 관계는 <와호장룡>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관계에 기초한 사랑과 복수와 인연 같은 서사의 진척이 미약하기 때문에 영화의 긴장도는 <와호장룡>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개인과 국가의 충돌

장천의 창, 비설과 파검의 검을 진상한 무명은 10보 거리에서 왕을 알현하는 데 성공한다.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왕은 무명의 호흡을 통해 그가 자객이라는 사실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고, 그들 사이의 관계도 거의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무명의 시도가 좌절로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그들 사이의 대화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학자이자 서예가인 파검의 화두인 '천하'다. 끝없는 전쟁과 살육의 종언을 준비하는 왕은 사사로운 원한의 정도와 규모를 능가하기에, 그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천하통일의 대의를 완수할 수 있도록 왕을 살려두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장예모의 이런 전갈은 자못 섬뜩하다. '나무를 베다 보면 부스러기들이 튀기 마련'이며, '숲을 보아야지 나무를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선명한 대의가 정당하다 못해 아름답게 들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태도는 양적인 사고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거기에서 모든 것은 크고 작은 것, 무겁고 가벼운 것, 검은 것과 하얀 것으로 나누어지며, 반드시 그렇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이분법의 사유체계가 지배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소우주이며, 어떤 소우주도 대우주와 나란하다'는 사유는 그 어디에도 발 디딜 곳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장예모의 영화 <영웅>의 서사적인 틀은 이런 대국주의, 천하주의, 전체주의, 강국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거기서 개인의 존재와 개인에 기초한 크고 작은 관계는 무의미해진다. 오로지 전체와 국가가 모든 것의 출발이자 종점인 것이다.

파검이 여덟 자 비단에 새긴 글씨 '검'에 담긴 큰 깨달음에 도달한 왕이나 그런 왕을 살려두는 무명에게는 '무협'의 세계에서만 이해되는 교감이 있다. 왕은 검의 궁극적인 존재의미는 그것을 통한 죽임이 아니라, 상생에 있음을 설파한다. 그러하되 왕의 배후를 짓치고 들어가지만 최후의 순간에 검을 거꾸로 잡고 마는 무명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무릇 모든 존재하는 것은 아름다우며,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우리가 설득될 어떤 인과성 혹은 필연성이 결석해 있다면 이 영화에 아름답다고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영웅>은 이런 측면에서 화면의 아름다움에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다채롭다 못하여 현란하기까지 한 영상은 더러는 강렬한 원색의 빛깔로, 더러는 잿빛의 은밀한 엄습으로, 더러는 파스텔의 은은함으로, 더러는 모든 색조들의 탈색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이것뿐이랴. 시각과 더불어 음향과 음악은 얼마나 강력하게 인간영혼을 접수하고 있는가. 나아가 인물들의 가공할 무공은 소리 내서 읽는 무협지를 눈으로 보고,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과도 같은 무협의 수준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영웅과 사랑에 대하여

<영웅>에서 우리는 '무명'이 영웅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비설-파검-여월로 이어지는 인간관계, 혹은 애증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허다한 무협영화에서 우리는 숱한 영웅을 보았고, 수많은 미인을 목격했으며, 다채로운 정의와 선에 감동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무협영화는 여성을 부차적인 존재로, 사랑을 대의명분을 수행하는 걸림돌 정도로 다루었다.

이런 점에서 왕가위의 <동사서독>이나, 이안의 <와호장룡>은 전혀 다른 계보를 이루는 영화다. 장예모는 진시황 암살음모를 둘러싼 거대한 스펙터클과 사랑을 매개로 전개되는 인간관계 혹은 영혼의 문제를 섬세하게 조화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자는 성공했으되, 후자는 실패했다.

그것은 무명과 장천이 위에 적시한 세 인물과 그 어떤 필연적인 관련성도 없는 일화적인 인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 사람의 애증관계 역시 어떤 구체성이나 입체성 혹은 시간성으로 얽혀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기쁨'이나 '슬픔'이 온전히 독서되지 못한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왜 그런가? 

비설과 파검의 관계는 소박한 일상적 사랑의 범주에 머물러 있으며, 여월의 존재는 이들 관계에 너무 퇴색하여 '몸종'과 '상전'의 그것에 정지해 있다. 비설의 공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파검이나, 그런 파검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설은 어떤 공감되고 설득력 있는 연인들로 보이지 않는다. 여월의 과거행적은 불분명하고, 파검의 죽음 이후 그녀의 행장은 어디를 향할지 알 수 없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영화 속의 정지화면처럼 머물러 있다. 정지해 있는 모든 것은 지루하며 단조롭고,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오직 현재성, 그것도 서서히 부패해 가는 현재성만을 담보할 따름이다. 하물며 정과 동의 치열한 교직을 생명으로 하는 '무협영화'에서 정체된 관계는 무공의 역동성과 대비되면서 그 빛과 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영웅>에서도 사랑과 영웅성은 공존하지 못하고 철지난 단풍잎처럼 빛바랜 것이다. 

 

 

*** 이 글은 민교협 홈페이지와 ‘오마이뉴스’에 공동으로 연재됩니다.
기사 바로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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