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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록의 정원에서 만나는 비와 사랑이야기 (<언어의 정원>)
저자 김규종(경북대학교)


                         초록의 정원에서 만나는 비와 사랑이야기 (<언어의 정원>)

 

                                                                                                      김규종(경북대학교)

 

 

글을 시작하면서

 첫사랑은 얼마나 상큼하고 설레는 것인가. 예외가 있겠지만 세상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한때는.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물레방앗간에서 말 못할 심정으로 첫사랑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날 밤의 달콤하고도 가슴 아린 사랑의 추억이 없었다면 그는 그 신산한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소나기>의 얼굴 까만 소년은 멋진 사내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소녀의 죽음이 가져다준 아픔을 오래도록 추억했을 것이다. 사랑은 아픔이거나 고독의 상처이거나 혹은 인생의 고달픔을 견디게 해주는 묘약일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오늘도 허다한 청춘 남녀들이 사랑에 몸을 던지고 괴로워하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속 5센티미터>(2007)와 <별을 쫓는 아이>(2011)로 한국 관객에게 친숙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영화 <언어의 정원>이 상영되고 있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숨바꼭질>, <감기>가 맹위를 떨치고 있어서 영화관은 조용하다. 감수성 풍부한 여성관객이 압도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비 오는 날의 만남

 구두 디자이너가 되려는 고교 1년생 다카오는 비오는 날 아침이면 수업을 짼다. 동경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신주쿠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호젓한 정자 아래서 비를 피하면서 구두 스케치에 몰두한다. 동북지방에 장마가 시작되면서 그의 오전시간은 공원에서 소진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카오는 20대 여성 유키노를 만나게 된다.

 

 맥주를 초콜릿과 함께 먹는 유키노. 그들은 비오는 날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자에서 대면한다. 만남이 잦아지면 기다리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러면서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나이 어린 다카오는 유키노의 질문에 응대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현상일 터. 감독은 그런 장치를 다카오의 엄마와 그녀의 애인관계에 부설해 놓았다. 연상인 다카오 엄마가 띠 동갑 사내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다카오 형제에게 어떤 부담으로도 작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카오와 유키노가 띠 동갑이라는 사실이 객석에 반감을 야기하지 않음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사랑, 그 이전의 사랑이야기

 사랑이야기를 담되 그 이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감독의 의도다. 그것은 사랑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물어보려는 그의 흉중에서 발원한다. 그것을 일어판 영화 포스터에 나와 있는 두 글자 '孤'와 '悲'에서 확인한다. 외로움과 슬픔으로 번역되는 글자다. 외로움과 슬픔이 왜 사랑과 결부되는지 숙고하도록 하는 영화가 <언어의 정원>이다.

 

 엄마는 밖으로 돌고, 형도 애인과 동거할 집으로 이주해버려 홀로 남은 다카오. 그는 자신의 장래희망도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인물이다. 학생들의 의도된 오해와 학부모의 왜곡된 행위로 인해 남다른 소외와 고독 그리고 슬픔을 경험해야 했던 유키노. 그들이 각자의 아픔을 감춘 채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시퀀스의 연속.

 

 <언어의 정원>은 어찌 보면 단순하고 빤해 보인다. 그렇고 그런 삼류애정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 막내 이모쯤 되는 여인에게 이끌리는 영화의 장치가 그러하고, 비가 오는 날의 정취도 그러하고. 그러하되 그런 면모를 고상하고 아름답게 인도하는 장치가 있었으니, 이름 하여 하이쿠와 사촌뻘 되는 '만엽집'이다.

 

첫사랑의 유치함을 넘어서는 문학의 힘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유키노가 다카오에게 속삭이듯 들려주는 시 구절이다. 하이쿠보다는 길지만, 일반적인 서정시보다는 훨씬 단출한 만엽집이다. 유키노는 이런 시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한다. 하지만 다카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나는 여기 머물 겁니다."

 

 시간이 흘러 다카오는 유키노가 읊조리는 시에 답가를 하게 된다. 그것이 <언어의 정원>에서 감독이 전달하려는 사랑의 근간이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설 때 비로소 가능한 언어의 저 막강한 위력을 감독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시는 인간 영혼의 응축인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이런 형태로 자신의 내면풍경을 소통하는 것은 고답적이지만 깊이 있고 아름다워 보인다. 일회적이고 감각적이며 얇고도 얕은 현대의 사랑에 대한 지극한 거부와 미래의 지향점을 과거의 시에서 찾은 것이다. 시와 문학의 힘이다.

'

걷는다'는 것의 함의

 영화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표현이 걷는다는 말이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행위가 걷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카오는 다가오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마냥 떠돌고 있다. 정말 자신에게 구두 디자이너의 재능과 소질이 있는지, 앞날의 성취가 얼마나 가능할지 그는 아무런 믿음도 구체적인 기획도 없다.

 

 학교로 출근하려 하지만 유키노는 학교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걷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유키노. 그녀가 맞닥뜨리는 문제는 자신감 상실과 대인기피증이다. 세상으로부터 탈진하여 혼자의 공간으로 설정한 공원 모퉁이에서 초콜릿과 맥주를 먹는 유키노. 그녀는 누군가를 향해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걷고 싶다.

 

 

 

 

 

 

 

 

 

 

 

 

 

 영화에서 다카오가 준비하는 구두 스케치와 최초의 구두가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그것은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하려는 다카오와 길을 걷다가 걷는 것이 어색해져버린 유키노를 위한 소품이다. 이렇듯 <언어의 정원>은 대단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품 하나로 인물과 인물의 관계와 내면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대단한 작품이다.

 

치유하는 영화 (?)

 초록이 물결치고 빗방울은 부드럽게 부서지며 춤추고, 멀리 동경시내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빛난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비는 바람을 타고 탱고를 추며 하강한다. 작은 동심원들이 그린 듯 물결치고,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종종걸음을 서두른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두 남녀가 망연자실 서있는 풍경은 또 어떠한가.

 

 감독이 그려내는 풍광은 우리가 오래도록 잊었던 자연의 존재와 속삭임을 일깨운다. 강렬하지 않지만 운치 있고 차분하게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모든 것들을 섬세한 필치로 잡아내는 그의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다. 버드나무의 흔들림과 소금쟁이의 신속함, 이제 막 허물을 벗은 연초록 매미의 우화장면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것인가.

 

 

 

 

 

 

 

 

 

 

 

 

 

 

 <언어의 정원>은 문학과 회화가 어우러져 사랑의 의미와 진전의 서사가 어떻게 초록공간에서 가능한지 보여준다. 감독은 그들이 힘겹게 전진해나갈 때마다 비와 바람과 풍경이 어떻게 그들의 내면과 상호 조응하는지 섬세하게 잡아낸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하며 가치 있는지 새삼 일깨운다.

 

글을 마치면서

 영화는 아주 짧다. 정말로 여기가 끝이야, 할 정도로 짧은 분량이다. 45분이나 흘렀을까, 마지막 자막이 올라간다. 볼멘소리도 들린다. 그렇지만 대다수 관객은 조용하다. 오래도록 영사막을 지켜보는 관객에게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 일찍 나가는 관객은 그만큼 손해다. 이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언어의 정원>은 흥미가 반감된다.

 

 초록에서 설경으로 전환하는 그 짧은 시퀀스와 감독의 당부는 영화의 재미를 일깨운다. 그런 식으로 감독은 느릿하고도 여유롭게 삶의 한고비를 넘었거나 이제 막 고개를 넘어가려는 청춘들을 위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어린 영혼들 모두에게 위대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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