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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구촌 평화를 위한 미국 자유인들의 축제 -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
저자 장시기(동국대학교)


  

 

                        지구촌 평화를 위한 미국 자유인들의 축제

                                                                                            장시기(동국대학교)

 

 


I.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경계인, 이안 감독

 대만 출신이면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안 감독은 서구의 근대가 만든 동양의 식민지성에 갇혀 있지도 않고, 또한 서구에 대한 맹신으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이슬람과 같은 지구촌을 구성하는 개별 지역의 동아시아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쿵후 선생>(1991)을 시작으로 <결혼 피로연>(1993), <음식남녀>(1994),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 <아이스 스톰>(1997), <라이드 위드 데블>(1999), <와호장룡>(2000), <헐크>(2003), <브로크백 마운틴>(2005), <색계>(2007)에 이어 <테이킹 우드스탁>(2009)까지 동과 서를 넘나들면서 동양과 서양의 지역성을 넘어 상호 공존의 지구촌 세계의 삶에 대한 영화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며 또한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근대적인 언어와 제도의 경계이지 탈근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스크린 이미지의 경계가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또한 그렇다.


 <색계>에서 1938년의 홍콩과 1942년의 상해를 넘나들며 서구의 근대화가 만든 당시 중국의 서구적(혹은 식민지적) 근대성과 저항적(혹은 폐쇄적) 근대성의 이분법 속에서 한 여성의 욕망이 지니는 탈근대성을 보여준 이안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 조그마한 시골 마을의 지역성 속에서 지구촌 평화를 위한 미국 자유인들의 축제가 지니는 탈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것처럼 1969년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이 이미 파국을 맞이한 서구 유럽의 근대성을 계승하면서 오직 서구 유럽의 백인들만을 위한 국가가 되어 지구촌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 있던 시대였다. 그것은 서구 유럽의 근대성이 만든 가장 큰 피해자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 최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시절이고,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근대 서구 유럽의 식민지들을 미국이 고대로 물려받아 지배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베트남 남북전쟁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절이었다.

 

 1969년은 또한 "아폴로 11호"로 명명되는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서구 근대산업의 과학기술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구 문명과 기독교 그리고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든 서구 근대화의 과학기술은 서구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면서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전쟁의 도구로만 사용되었지 지구촌의 평화와 생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절정이 바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우드스탁 페스티벌로 표현된다. 그래서 1969년의 미국 뉴욕 주 한 시골마을에서 이루어진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는 서구 근대성이 지구촌 전체를 "참혹한 전쟁의 잔상"과 "의미 없는 인종차별" 그리고 "혼돈에 빠진 (근대) 이데올로기"라는 근대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와 상생의 연대를 위한 탈근대성의 이미지를 아직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안 감독은 다시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미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II. "지역적으로 살고 지구적으로 사유하는" 탈근대인
  근대인에서 탈근대인으로 변화하는 삶의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개인이 살고 있는 지역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키며, 마침내 지구촌 전체를 갈등과 대립에서 평화와 상생으로 만드는 그 우연한 사건은 바깥을 보려고 하지 않는 개인이나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지역과 사회,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국가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 매일 우리의 주변에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이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가족에게 갇혀있고,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리엇 타이버(드미트리 마틴 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엘리엇은 다른 자식들처럼 늙은 부모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뉴욕 주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갇혀서 살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생각은 외부에 열려 있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친구에게 그렇고,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네 노인들에게 그렇고, 히피와 여성주의자와 마약과 동성애에 대한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마음이 열려 있는 엘리엇으로 하여금 외부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가족주의의 가족이고, 지역주의의 사회이며, 국가주의의 미국이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가 우리를 근대인의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엘리엇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때문에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야만 한다. 사건은 바깥과 만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깥이 아니라 나와 다른,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와 논리와 사유를 하는 타자와 만나는 것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온갖 근대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소문만 무성한, 그래서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해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빨갱이들의 축제"이다. 엘리엇은 "빨갱이들의 축제",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만난다.

 

 

 

 

 

 

 

 

 

 

 

 

  모든 만남은 사건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만남의 당사자들로 하여금 각각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가족의 한 구성원이고 지역의 한 주체이며 국가의 주인으로 거듭나서 가족과 지역과 국가를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닌 상생의 구조로 재구성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권력자들은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히피라고 부르며 여성주의자라고 부르며 마약중독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라고 부르며, 마침내 빨갱이라고 부른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주인공 엘리엇은 실제로 히피가 되기도 하고, 여성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마약중독자가 되고, 동성애자가 되며, 마침내 빨갱이가 된다. 단지 그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그렇게 보수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그렇고, 심지어 유태인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의 어머니도 순간적으로 마약중독자가 된다. 그것은 모두 근대의 가족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서로 상생하는 일대 일 관계의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재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엘리엇이 우연하게 만든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사건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인간의 사유, 즉 두뇌를 구성하는 눈과 귀의 만남이다. 눈과 귀의 만남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미지를 그리는 미술과 귀로 듣는 소리라는 음악과의 만남이다. 미술과 음악의 만남이 엘리엇의 두뇌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엘리엇처럼 다시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어머니도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듣고, 또한 동일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어머니는 궁극적으로 다시 사유하지 않는다.

 

 엘리엇이 다시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가 편견을 가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귀에 들리는 소리의 선율에 그의 몸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몸은 예전에 있었던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예전에 있었던 관념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음악의 선율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리듬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축제는 끝났다.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삶의 장소로 되돌아가고, 엘리엇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또 다른 축제를 위한 새로운 미래의 창조이다. 엘리엇의 마을은 미국 뉴욕 주의 조그마한 시골이 아니라 미국의 중심이 되었다. 엘리엇뿐만 아니라 엘리엇 가족도 또 다른 축제를 준비해야만 한다. 엘리엇과 엘리엇의 아버지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어머니는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과 가족의 관계를 위한 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얼마나 불쌍한가?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사람. 그것은 썩어가는 것이고 또한 살아 있으되 죽어가는 것이다.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어디 영화 속의 엘리엇 어머니뿐이겠는가?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경계인, 이안 감독은 엘리엇의 어머니가 아직도 미국의 국가주의와 지역주의와 가족주의 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69년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여 1969년의 그 때처럼 지구촌을 "참혹한 전쟁의 잔상"과 "의미 없는 인종차별" 그리고 "혼돈에 빠진 (근대) 이데올로기"로 몰고 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드스탁>이 아니라 <테이킹 우드스탁>의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III.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 "우드스탁 코리아"
 2010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일대에서 열리기로 한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 "우드스탁 코리아"가 돌연 취소되었다는 것에 평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원성이 드높다. 그 내용과 이유가 어떻든 간에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가 돌연 취소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다. 거대 기업이나 국가가 관객을 동원하여 축제를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

 

 "우드스탁 코리아"는 취소되었지만, 올 여름 홍대 앞과 대학로를 비롯하여 춘천과 강릉, 주문진과 함양, 만리포와 해운대 등등의 수많은 피서지에서 코리아의 평화와 음악을 위한 축제는 근대의 전쟁과 인종차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수없이 많은 사건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건들은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에 등장하는 열려 있는 마음의 소유자, 엘리엇 타이버의 눈과 귀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근대적 사유가 아닌 탈근대적 사유를 통한 탈근대적 삶을 영위하게 만들었듯이 코리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엘리엇들로 하여금 지역적으로 살고 지구적으로 사유하는 탈근대적 삶의 길을 열어놓았을 것이다.

 

 "우드스탁 코리아"가 아니라 영화와 같은 미국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의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우리는 "2002 월드컵"과 "촛불문화제"에서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2002 월드컵"과 "촛불문화제"를 미국 뉴욕 주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처럼 우리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열어야만 한다. 엘리엇과 같은 열려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대한민국에도 수없이 많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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