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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숙한 청년 승민과 허망한 노년 적요의 욕망에 대하여!
이름 김규종


언제부턴가 동양고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얻는 크고 작은 앎의 세계는 흥미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단아하면서 모범생 분위기를 풍기는 <논어>, 고졸하되 초월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도덕경>, 통렬하고 공격적이지만 장쾌하기 그지없는 <장자>. 이들 서책을 벗 삼아 한여름 무더위와 지긋지긋한 습기를 이겨내는 것도 피서의 방편 하나는 되리라 믿는다.


<장자>는 첫머리부터 일상에 찌들고 잘아터진 21세기 소시민을 후려갈긴다. 삼천리 물결을 일으키며 구만리 상공을 날아오르는 ‘대붕(大鵬)’의 뜻을 알 리 없는 매미와 비둘기를 비난하면서 장주는 말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어린아이는 어른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에 돋아나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땅강아지와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목숨이 짧기 때문이다.” (<장자>, 내편 ‘소요유’)


생명이 긴 것과 짧은 것, 큰 것과 작은 것, 멀리 높이 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를 구별하면서 장자는 그것들 사이의 분별을 지적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이 이런 분별을 얼마나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하되 우리는 나이와 지식과 교양과 직분에 무관하게 젊고 팽팽하며 아름다운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를 사랑하고, 거기 몰두하며, 그런 조건을 갖추고자 무진 애를 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지난 3월 22일 개봉하여 허다한 인총의 첫사랑을 따사롭게 불러냈다는 평을 들은 <건축학개론>과 박범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은교>(4월 26일)에서 우리는 대조적인 두 남자와 만난다. 그들의 이야기를 살핌으로써 어떤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드문 예외를 빼놓으면 이것은 설득력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첫사랑에서 우리는 대개 ‘조직의’ 쓴맛을 단단히 보게 된다. 그것은 미숙함, 조급함, 소소함, 쩨쩨함, 순수함, 어처구니없음, 황당함, 졸렬함 등등의 수식어를 모두 가져다 붙여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물론 아직도 이런 설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에 관한 한 철부지로 남아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여러분이나 글을 쓰는 나는 어떤가?!)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승민은 순도(純度) 99퍼센트를 자랑하는 스무 살 청춘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에 담긴 여러 가지 혼재양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는 그를 ‘찌질남’이라 부른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애태우다가, 혼자서 미친놈처럼 좋아서 날뛰다가, 상상의 날개를 달고 여기저기 날아다니기도 한다. 상사병의 각종질환을 생쑈로 보여주는 미숙한 승민. 아마 우리 모두는 그런 승민의 허다한 양상 가운데 한 가지를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돈 후안이나 카사노바 같은 경지에 이른 혹은 타고난 선수들은 예외겠지만.


승민을 찌질남으로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누군가를 가슴 깊은 곳에 품었다면, 그런데 사랑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는 썩 나서서 연적과 정면승부 해야 하지 않을까. 이기든 지든 한판 제대로 붙고 난 다음 뒷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승민은 스무 살 청년의 패기와 당당함과 들끓는 영혼을 비겁하게 잠재운다. 그리고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에게 아주 악독한 말을 내뱉는다. “이제 그만 꺼져줄래!” 아니, 저토록 찌질할 수 있다니!


“선생님, 그 아인 고등학생입니다. 이건 수치스러운 추문일 뿐이라고요!” 고희(古稀)에 이른 시인 적요에게 쏘아 붙이는 악덕제자 서른 청춘 지우의 말이다. 그가 보기에 적요가 은교를 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우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터.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급한 욕망에 지나지 않아요!” 일흔 살 먹은 노인이 열여덟 살 여고생 은교를 탐한다. 은교의 허연 허벅지와 가슴과 속살을 탐한다.


세상으로부터 추앙받지만 세상과 절연하고 살아가는 적요는 쓸쓸하고 고적하다. 그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세상의 통로인 지우는 비열한 인간이다. 스승이 써준 장르소설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나서 스승의 글을 도둑질하여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것은 표절(剽竊)을 넘어선 완벽한 강도짓이다. 그의 욕망은 여기 머물지 않는다. 은교를 향한 적요의 마음을 알면서도 지우는 은교와 사랑행각을 벌인다. 그것도 적요의 집에서.


흥미로운 점은 은교 역시 적요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온전히 지우에게 내준다는 사실이다. 은교의 젊고 팽팽한 육신과 여물지 않은 영혼이 지우의 건장한 몸과 사악한 영혼과 만나서 끓이는 도도한 섞어찌개를 몰래 훔쳐보는 적요의 깊은 흉중에 자리하고 있을 쓸쓸함과 처연함이 눈물겹도록 다가오는 것이다. 나이 들어도 조금도 숙지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향한 사내의 갈망과 지향의 결과가 처절한 형태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나는 적요의 형언하기 어려운 절망과 나락을 독서하면서 몸서리쳐야 했다.


왜 그는 말하지 못했을까. 왜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일까. ‘너를 욕망한다고. 너를 가지고 싶다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그것은 정녕 죄악인가. 그것은 생각조차 해서는 아니 되는 피안의 금지 영역인가. 어째서 적요는 어줍지 못한 제자의 도적질을 용인하고, 나아가서는 가슴에 품은 아리따운 청춘의 은교마저 몽땅 빼앗기고 만 것일까?!


노년이든 청년이든, 완숙하든 미숙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모든 생명은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삶으로 충만한 육신과 영혼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최적지표이기 때문이다. 유치하고 어리석었던 청춘시절의 승민은 이제 서른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가 선택한 최종지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찌질하고 못난 자폐증적인 결론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한다. 끝내 은교를 잊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품었던, 이제는 너무도 추레하고 허접한 인간이 되어버린 적요에게 충고한다. “이제 은교를 놓아주시라. 은교에게 꽁꽁 동여매어진 당신 영혼을 해방하시라! 장자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승민은 이제 곧 ‘불혹’으로 접어들 것이고, 적요는 인생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나이를 훨씬 지나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혼란과 고통, 심장의 격심한 통증과 고동소리가 무탈하게 정상상태로 회귀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들에게 <수타니파타>의 단순명쾌한 답변을 치유제로 제공하고자 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이 글은 2012년 7월 10일 출간된 <대구여성> 104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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